유대교와 이스라엘 영토 분쟁 > 학술자료

본문 바로가기

학술자료

유대교와 이스라엘 영토 분쟁

작성일 18-11-03 21:00

페이지 정보

작성자최고관리자 조회 96회 댓글 0건

본문

유대교과 이스라엘 영토 분쟁

IDEA스터디/홍준표

약 3000년간 이어진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수복에 대한 역사를 간과한다면, 이스라엘을 둘러싼 영토 분쟁을 이해하지 못하며, 이후 4번에 걸친 중동전쟁 또한 이해하지 못한다. 중동 지역의 갈등은 단순히 '영토/자원싸움'이라는 보편적인 논리가 작용하고 있지만, 한 편으론 종교적인 세계관도 크게 작용하고 있어 복잡하다. 분명 국제정세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있어 생존과 경제적인 논리가 그 첫번째임이 분명하지만, 서구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유대 금융자본세력은 역사적으로 국제정세의 큰 축을 담당해왔으며, 종교적 세계관으로 이 지역을 해석할 여지도 분명 존재한다. 나아가 이 글이 누가 ‘옳고 그르냐’ 라는 문제 이전에 ‘어떠한 시각으로 이 문제를 바라봐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되기 바란다.

유대교(Judaism)와 유대인(Jews) 그리고 이스라엘
현대의 유대교는 유대교의 일부인 바리새파가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유대교는 바리새파의 해석 전승에 따라 <타나크>(히브리어 기록된 성서이자 유대교가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의 구약)를 따른다. 구약이란 '옛 계약'을 말하며 로마 시대 때 신약성경이 나오면서(382년 로마 공의회에서 새롭게 정한 경전들을 '신약(New Testament)'으로 부르기로 2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결정) 이와 구분을 짓기 위해 '구약'이란 표현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신약과 대비되는 '옛 계약'이라는 구약이란 표현을 쓰지 않으며, '타나크' 혹은 '히브리어 성경', '유대교의 경전' 등으로 지칭한다.
'토라(모세오경 또는 모세율법)'는 히브리어로 '가르침, 법'을 말하며, 우리가 말하는 구약의 첫 다섯 편으로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를 말한다. 유대교에게 토라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계시(사람의 지혜로써는 알 수 없는 진리를 신이 가르쳐 알게 함)'한 것이 담긴 '율법서'라 말한다. 이 '율법서'는 이스라엘인들이 역사적으로 핍박받고 방황하는 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만의 가치 체계(에토스, ethos: 개인으로부터 독립된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객관적인 존재, 개인의 태도 차원에서의 내면화된 것. 쉽게 말한다면 윤리나 관습, 시대정신, 사회를 이끌어가는 원동력 정도)를 지키고, 유대인들을 강하게 묶어 지금까지도 그들을 이어주는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토라로 묶여진 유대교는 이후 탈무드(성서의 원본이라고도 얘기되어짐)를 거쳐 전 세계 유대인들 사이에서 하나의 신앙과 철학, 삶의 방식(문화)이라는 형태로 자리 잡는다. 유대교는 현재 미국 동부의 핵심 지역인 뉴욕/워싱턴과 이스라엘에 분포하고 있다.
 
지정학적으로 이스라엘은 중동아시아와 아프리카, 나아가 유럽 대륙을 연결하는 교량적 위치에 놓여 있다. 역사적으로 이 지역은 상업의 교역로, 권력의 완충지, 그리고 종교의 발상지 등으로 모든 갈등의 원인이 집중된 곳이다. 고대 4대 문명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수메르 문명)와 이집트 문명이 직접적으로 충돌하는 지역이었으며, 서구 문물이 이스라엘을 지나 동방 문명과 충돌하는 지역이기도 했다. 서쪽은 지중해, 동(요르단)/북(시리아)은 높은 산지이며, 남쪽(이집트)은 사막이다. 유프라테스/티그리스 강을 따라 초승달 모양을 이루어 발달한 평야는 '기름진 초승달(Fertile Crescent)'의 끝부분을 이룬다. 동양에서 말하는 풍수지리로 치면, 가장 완벽하게 들어맞는 곳인 셈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기준을 잡기 나름이지만, 유대인의 선조이자 최초의 이민자인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인 이삭과 야곱으로 3대에 이르는 부의 축적과 전쟁의 역사, 이집트에서 총리 대신 자리에 오른 4대째 요셉의 이야기, 그리고 모세 5경이 포함된 히브리족의 역사를 말하기도 한다. 이들의 역사는 히브리 성서에 녹아있다. 아브람-이삭 뒤를 이은 야곱이 4명의 아내로부터 얻은 12명의 아들은 각 이스라엘 지파의 조상이자 각각의 역사로 전개되며, 이같은 족장 중심의 역사를 모두 묶어 하나의 계보(부족 집단)로서 히브리 성서가 탄생했다는 것이 보편적인 견해이자, 이스라엘의 역사의 태동기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이스라엘이란
전통적 유대인들(히브리족)은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에서 (람세스 2세 시대인 기원전 13세기. 15세기라는 주장도 있다) 일종의 종교 지도자였던 모세를 따라 출애굽(Exodus)을 시작한다. 출애굽기에 따르면 모세는 40세 때 같은 민족이 학대받는 것을 보고 이집트인을 살해, 미디안 땅으로 도망간다. 80세가 되던 해 모세는 호렙 산에서 민족을 해방시키라는 야훼의 음성을 듣고 이집트로 돌아와 '열 가지 재앙'이란 도움을 얻어 '파라오'로부터 히브리족을 탈출시킨다. 그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Canaan, 현재의 이스라엘 혹은 시리아-팔레스타인)으로 히브리족들을 이끌기 위해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간다. 그는 시나이산에서 야훼에게 십계명을 받아 하나님과 히브리족들의 중개자 역할을 한다. 모세와 히브리족은 광야에서 40년간 유랑(유목민) 생활을 하지만 끝내 가나안에 도달하지는 못하고 120세에 죽는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히브리족을 이끌고 가나안에 입성한다. 그리고 그 가나안은 전통 유대인들에겐 '약속의 땅(Promised land)'으로, 지금까지 국제정세를 바라보는 데 있어 유효하다.
가나안(약속의 땅)은 창세기 12장에서도 나오며 최초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이기도 하다. 신은 아브라함(노아의 아들인 Ham)에게 메소포타미아의 최고의 도시 국가인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은 기근이 닥치자 이집트로 이주해 노예 생활을 시작한다. 모세 이후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에 정착, BC.11세기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지만, BC930년경 북이스라엘/남유다왕국으로 나뉘고 북은 BC722년 아시리아에게, 남은 BC586년 신바빌로니아에게 정복당해 이스라엘인들은 추방 혹은 포로 생활을 이어간다. 페르시아/그리스시대(BC.538~142) 말기 유대인들의 항거 운동 이후 유다 왕국의 정치적/종교적 독립이 이뤄지고, 약 80년간 하스모니아 왕조 아래 풍요로운 생활을 한다. 그러나 BC.63년부터 로마가 들어서고, 기원후 66~73년 대제국 로마를 상대로 반란(유대독립전쟁)을 일으키지만, 로마는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유대 성전을 파괴(AD70년)하기에 이른다. 이후 유대인들은 또 로마 제국 전역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디아스포라. 유목과는 좀 개념이 다른 난민 혹은 강제 이주 개념). 이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이 이뤄지면서 기독교가 꽃을 피우지만, 유대인들은 일 년 중 하루만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지위를 상실했다. 이후 페르시아가 예루살렘 정부를 승인하지만, 비잔틴이 예루살렘에 재입성(629년)하여 유대인들을 또다시 축출한다.
이후 636년 동로마 제국이 정통 칼리파에 패배한 뒤로 이스라엘 지역은 이슬람이 통치하게 된다. 1099년 1차 십자군 전쟁으로 예루살렘 왕국이 세워지기도 했지만 1197년 술탄국에게 빼앗긴다. 1517년 오스만 제국이 들어서 장기간 패권을 누린다.
이스라엘 지역은 1차 세계 대전에 동맹국으로 참전한 오스만 제국이 쇠락하면서 지금의 터키 정도에 머물게 되고, 중동 지역 대부분을 영·프에 내주게 된다. 이태리(베니스 상인)를 거쳐 스페인(포토시 발견) 등 유럽 전역에 걸쳐 종교적/경제적 자유를 찾아다닌 유대인들은 그 이동 경로에 따라 유럽의 패권을 변화시킨다. 그들은 상업에 종사한다는 이유만으로 박해을 받고 당시 척박했던 네덜란드(최초 은행) 지역으로 밀려났지만 네덜란드를 유럽 최강국으로 변모시키고, 이후 영국(로스차일드)으로 건너간다. 사치스럽고 멍청한 왕들을 대상으로 국채를 거래하며 유럽에서 상인/은행가 계급으로 세력을 키운 유대인들은 19세기에 이르러 시온주의 운동을 일으키고, 1917년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외무장관 벨푸어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데 동의한다는 내용의 서한(벨푸어 선언)을 유대계 영국인 은행가 겸 시오니즘운동의 재정적 후원자(시오니스트 동맹의 실질적인 권력자)였던 로스차일드 경에게 전달한다. 이는 2년 전 아랍 인들의 독립 국가 건설을 지지한다고 약속한 '맥마흔 선언' 이후 유대인들의 움직임으로 일궈낸 결과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1948년 5월 14일 영국으로부터 이스라엘 독립을 성공시킨다.

유대계와 아랍계 갈등의 시작
이스라엘은 1948년 팔레스타인 땅에 나라를 세움으로써 숙명적으로 아랍권과의 갈등이 시작됐다. 이스라엘은 아랍권과 1973년까지 모두 4차례의 중동전쟁을 벌였다. 1967년까지는 시리아가 동예루살렘을 포함해 요르단강 서안을, 이집트가 가자지구를 각각 통치해왔지만, 3차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와 가자지구, 요르단의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 시리아의 골란고원 등을 점령하였으며 총 네 차례의 중동전쟁 동안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지역을 차지하게 된다. 이스라엘 총리는 이집트와는 캠프데이비드협정을 통해 평화협정을 체결했지만, 팔레스타인 자치 문제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무력투쟁과 이어진 레바논 침공으로 미해결로 남았다. 비록 이스라엘 라빈 총리가 PLO 의장과 93년 오슬로협정을 맺어 팔레스타인은 임시 자치정부를 수립하지만,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팔레스타인 임시행정당국(PA)으로 이름을 바꿔 제한적인 자치를 하고 있을 뿐 점령지로부터의 이스라엘군 철수, 점령지 반환, 자치권 확대 등 구체적인 이행은 진전이 없었다.
실질적인 이행이 어떻든 간에, 라빈 총리는 오슬로협정을 체결시켜 94년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 내부 원리주의자 내지 극우주의자 혹은 민족주의자들의 반발로 95년 암살된다, 이후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팔레스타인 당국으로의 점령지 반환을 거부하면서 오슬로협정은 사실상 중단 상태에 이른다. 96년 하마스의 자살폭탄테러가 발생하고 크고 작은 분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2003년 미국·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 '중동평화 로드맵'에 서명함에 따라, 이스라엘은 1967년 3차 중동전쟁 당시 점령한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의 예리코에서 2005년 9월 완전 철수한다.

현대 시온주의에 대한 논쟁과 민족 이데올로기
시온주의(Zionism)는 기본적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 예루살렘을 수복하자는 민족주의 운동이다.
강력한 민족주의를 대변하는 '네오-시온주의'를 따르는 자들은 '확대 이스라엘’(Greater Israel–성서시대, 특히 솔로몬의 영토를 확보할 때까지 이스라엘 영토를 확장시켜 나갈 것을 주장하는 이들의 용어)을 주장한다. 이들은 전 세계 유대인들을 이스라엘 땅에 이주시키고 유대 전통(유대교)에 기반한 히브리어 교육으로 유대인의 정체성을 하나로 묶기 전까지는 시온주의 운동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그것이 본래 시온주의의 목표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전통 유대교를 따르며 유대국가의 정치–문화적 세속화를 경계한다. 쉽게 말해 근본주의자·원리주의자(fundamentalist)들이라고 불리는 이들이다.
한편 ‘포스트-시온주의’는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시온주의의 목표를 달성했다고 본다. 이들은 유대인 귀향법(1950년 제정. 유대인이라면 자동적으로 이스라엘 시민권을 부여하는,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을 고취하는 법안)에 반대한다. 귀향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흩어짐’은 하나님의 심판이요, 흩어진 유대인들의 ‘모음’(귀향)은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고전적 신학사상에 기초한 것이다. 포스트시온주의자들은 귀향법에 반대하는 것 이외에도 원리주의자들과 대조되는, 예를 들어 유대인은 혈통이 아닌 유대교에 대한 믿음 자체만으로 유대인이라고 분류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현대주의자 혹은 탈민족주의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귀향법에 대해서 2600여간 이어진 디아스포라에 대한 반작용으로 본다. 일찍이 르낭과 니체는 자신의 정체성을 특정한 그룹에 귀속시키려는 소속감(Group identity)에 대해 일갈한 바 있다. 르낭은 '민족'이란 개념에 대해 '핍박받은' 역사적 인식을 공유하는 집단이라 규정하였고, 니체는 인간의 존재론에 대해 오직 '개인' 만이 존재한다고 설파했다. 민족에 대한 르낭의 견해는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련의 피의 숙청에 대한 고뇌의 결과로 얻어진 지혜였으며, 개인만이 존재한다는 니체의 결론은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자신의 눈으로 직접 살육의 현장을 목격했던 바에 따른 위대한 철학적 고찰이었다.
일각에선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방을 강제로 빼앗았다며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영토 분쟁 문제에 대해서는 그들의 역사성을 고려해야 될 문제이며, 국제정세에 대한 해석에 있어 ‘강력한 힘’ 만이 오직 국가를 지킨다는 일반 이론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이 문제가 비난만으로 해결될 일은 결코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전쟁과 영토 문제에 대한 비판의 기준은 어떤 가치를 중점적으로 두느냐로 판단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지역 수복 후 미국이 추구하는 가치를 토대로 부강한 국가로 거듭났다는 점에서 만큼은 지정학적으로 위험 지역에 속하는 우리나라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toliberty.kr. All rights reserved.